인간이 살아온 모습이나 행위로 일어 난 사건의 기록을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따른 필연의 연속일 것이다. 자연이 주는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예측 가능한 삶의 방편이자 자신들의 실수를 줄이기 위한 제도와 질서를 끊임 없이 구축하며 살아왔다. 자연이 부리는 변덕 그리고 자신들에 의한 우발적 사건들을 최소화하기 위한 유구한 노력은 고스란히 빛나는 역사가 되어 인간 존엄을 뒷받침하는 당위가 되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확연히 드러나는 필연만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오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어설픈 독일어 실력을 갖춘 외국인 기자의 글 실수로부터 시작된 베를린 장벽의 와해는 통일과 화해라는 근사한 선물을 안겼지만 이러한 아름 다운 결말은 극소수일 뿐, 대개의 우발적 사고들은 인간의 집단광기를 자극하여 놀랍도록 피폐한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인간은 필연의 고리들을 촘촘히 엮어 예측 가능한 직선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지만 직선의 방향이 꺾이는 마디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발적인 고리들의 이탈과 상실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을 인간의 역사를 넘어 생명의 역사로 확장해 볼 때 그 파급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아주 먼 옛날 우주에서 우연히 날아온 운석이 한 때 이 땅의 주인이었던 공룡들을 아무런 맥락 없이 한 방에 날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즈음 되면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역사 속의 우연이 이성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고 논증하는 데 노력을 쏟기보다는, 잃어버린 고리 그 자체를 찾아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정상수 작가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잃어버린 고리에 대한 그의 사유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 고리들에서 파괴와 소멸로 점철된 열패감을 맛보았던 역사학 자들과는 달리 그는 생명의 진화라는 보다 내밀한 주제와 시각으로 그 속에 잠재된 창조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정상수 작가의 이번 작업 주제는 ‘Missing Link’이다. 잃어버린 고리 또는 멸실환滅失環을 지칭하는 미싱 링크는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상실된 종으로, 진화의 중 간단계에 해당하는 어떠한 종이 존재하였음 이 추정되는 데도 화석으로 발견되지 않는 것을 지칭한다. 현존하는 생물과 화석으로 진화의 과정을 나열해 보지만 징검다리 마냥 띄엄 띄엄 복원되는 생물계도系圖는 정상수 작가에게 그 만의 미싱 링크를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어류와 양서류 또는 양서류와 파충류의 중간에 해당하는 견두류堅頭類,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시조새와 같이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생물체들은 어딘지 모르게 양가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작가는 어느 날 심해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발견되지 않는 생명 종에 대한 관심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심해어의 기괴한 모양새를 보며, ‘저것은 열악한 빛과 수압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태를 변형하기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돌연변이와 같은 변종인가’ 하는 물음은 작가에게 한동안 스컬피를 이용한 다양한 상상의 심해어들을 제작하게 하였고 이후 이러한 관심과 작업은 물 밖을 나와 지상으로 확장되었다.

2013년 설치그룹마감뉴스의 창작 워크숍 현장에서 작가가 작업한 「Missing Link- Nematodes」는 미싱 링크 작업의 분수령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풍성했던 나무를 누가 고사 시켰는가’ 하는 네러티브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상상의 생명 종을 그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다. 작금에 있어 발견된 생명 종과 발견되지 않은 생명 종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혹은 이러한 의문을 시간의 축으로 확대하였을 때 이제껏 파악된 생명 종으로 진화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은 곧 인간이 가진 퍼즐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럴 바에는 미싱 링크를 채워 줄 생명 종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창조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몇 만 년이 흘러도 인간은 결코 모든 퍼즐을 가질 수 없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발굴보다는 창작을 통해 근사치의 퍼즐을 갖는 것이 어떠 한 측면에서는 더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는 자신의 궁색한 퍼즐에 낙담하겠지만, 예술가는 상상의 퍼즐이 무궁하다는 것에 열광하고, 직감적으로 후자적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신의 창조를 모방한 예술가의 창작이 학문보다 위대한 지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상수 작가의 미싱 링크는 ‘발견’을 전재한다. 이때의 발견은 예술가에 의한 오브제의 발견과 유사하다. 작가는 어느 야산에서 혹은 서해의 갯벌과 제주의 바다에서 미싱 링크를 상상하게 하는 돌을 발견한다. 그의 작품 제목은 모두 돌을 발견한 날짜에 기인한다. 그 일자는 돌이 오브제로 선택된 날짜이자 그의 사유와 창작이 시작된 날짜이기도 하다. 돌이 발견되면 작가는 그 돌을 면밀히 관찰한다. 질감뿐 아니라 돌이 품은 세월의 지형들도 같이 더듬는다. 관찰은 직감에 의해 순식간에 끝나기도 하고 오랜 기간을 두고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돌 안에 숨겨진 생물의 변종과 같은 미싱 링크를 결정하면 관찰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미싱 링크의 형상을 돌에 붙이거나 새기는 방식으로 오브제성을 부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완성된 미싱 링크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의 시야가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작업이 생명 종 자체의 변종이 된 형태 혹은 양가적인 형태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기로 갈수록 작업의 양상은 해당 생명 종이 몇 만 년 전에 살았을 법한 환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돌을 발견하고, 발견된 돌에 미싱 링크를 붙이거나 새김으로써 오브제성을 드러내지만, 작가는 그 오브제성을 직접 부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탁본의 방식으로 우회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은유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한지에 의한 찍어내기는 오히려 돌이 품어온 세월의 흔적을 음양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그래서 한지에 찍혀진 미싱 링크와 그것들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깊은 심해가 되기도 하고 높은 산 중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발견과 덧붙임 그리고 탁본을 통한 각색에 이르기까지, 제작 과정에서 상당한 사유의 시간과 몸의 품팔이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을 드로잉이라 칭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생명의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가 짐이 소박할 때 미싱 링크가 가진 무한 상상의 잠재력에 한 발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적 직관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완결보다는 과정일 때 사유의 가치는 더욱 빛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창조는 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질적 비약이라 하였다. 또한, 생명적 흐름은 언제나 구체화하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곧 바로 물질과 타협하여 독자적인 개체성을 가지려 함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생명체가 개체성을 가지려는 경향은 개체 내부에서의 조화나 통일성보다는 무질서와 불규칙성, 갈등과 투쟁이 멜팅되어 폭발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때문에 진화에 있어 부조화는 필연적이므로 우리는 생명 종 사이에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도마뱀과 개구리가 하나의 종으로부터 진화되었는지 모를 일이고, 미싱 링크의 생물에서 보이는 매듭 조직이 퇴화의 흔적인지 혹은 또 다 른 진화의 출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진화의 본질이 우발적인 돌출이라면, 정상수 작가가 창조한 수많은 미싱 링크는 유별난 존재가 아닌 정상적인 진화의 결과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정상수 작가의 미싱 링크는 생명의 역사가 숨겨놓은 흔적과 같다. 작가는 그 흔적을 보이며 우리의 유전자 어딘가에 박혀 있을지도 모르는 태고의 기억을 불러내 함께 사유하기를 청하고 있다.

글. 채 영